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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을 꿈꾸는 남자
어렸을 때 히어로물을 보면서 나도 그 히어로와 함께 하는 동료가 되거나 내가 직접 히어로가 되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강력한 파괴력으로 적을 무찌르고 재빠른 스피드로 도시를 누비고 손에서 레이저를 발사하고 사람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을 물리쳐 찬사를 받고 자신이 구해준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꿈같은 이야기는 정말 멋지고 이상적인 삶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 소개할 이야기는 영웅이 되기를 원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영웅과는 전혀 다른 끝을 맞이하게 되는 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생화학 연구소의 경비원 마틴은 거미 인간 히어로 만화를 보며 자신도 그와 같이 히어로가 되기를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짝사랑하는 스테파니에게 마음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소심한 인간. 심지어 괴한이 쳐들어와 눈앞에서 동료들이 살해당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연구소에서 연구 중이던 거미의 혈청을 자신의 몸에 주사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는 만화 속의 거미 인간처럼 신체능력도 강해지고 거미처럼 벽도 기어오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힘에 취한 마틴은 자신이 정말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한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꿈에 그리던 히어로가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된다.
현실은 그에게 너무나도 잔인하고 냉혹했다
처음에는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마틴은 더 이상 예전의 소심하고 유약한 자신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강하고 재빨랐으며 용감한 히어로였다. 하지만 비극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에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발휘하는 만화 속 히어로들과 다르게 마틴의 몸은 점점 거미를 닮아가고 있었다. 팔의 핏줄이 거미줄모양으로 색이 변하는가 하면 손은 아예 거미의 다리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슴에선 거미줄이 나왔고 나오는 자리는 흉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자신의 몸이 변해 감에 따라 그의 정신은 점점 무너졌고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배가 고파 사람들을 납치해 피를 빨아먹고, 충동적으로 사람을 마구 때려죽이는 등 히어로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의 모습은 점점 더 거미처럼 흉측하게 변해갔고 그는 좌절한다. 만화에서 본 히어로들은 다들 강하고 멋지고 누구보다 정의감 넘치는데 왜 나에겐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왜 나는 선택받지 못한 것일까? 왜 나만 이렇게 변한 걸까? 이러한 그의 슬픔은 분노로 변했고 결국 완벽하게 악인으로 변하게 되었다. 영웅을 꿈꾸던 순수한 청년은 더 이상 없었다. 인간의 목숨을 빼앗아 배를 채우는 포식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괴물이 되었지만 버리지 못한 마지막 마음
그는 경찰에 쫓기며 자신이 사랑하는 스테파니를 납치했고 어째서인지 죽이지 않고 자신이 뽑아낸 거미줄에 묶어만 놨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경찰에게 그녀를 구하고 살인자인 자신을 죽이라 했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울부짖으며 그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외쳤다. 마틴은 그런 그녀를 위협하고 경찰은 갈등했다. 결국 마틴, 아니 괴물 거미는 스테파니에게 달려들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경찰은 괴물의 등에 총을 난사한다. 스테파니는 슬퍼하며 자신을 지켜줘서 고맙단 말과 함께 거미는 죽음을 맞이한다. 한 때 영웅이 되길 꿈꿨지만 한 마리의 괴물이 되어버린 그는 강한 정의감으로 사람들을 구해주는 멋진 히어로도,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나름의 신념으로 사람들을 지키는 다크히어로도, 그저 자신의 기분으로 의도치 않게 히어로처럼 행동하는 안티히어로도 아니었다. 그저 감염이라는 저주에 걸린 한 명의 나약하고 불행한 환자였다. 영화 제목의 영어 표기는 지구 vs 거미(Earth VS The Spider)지만 한국어 표기는 어째서인지 그냥 '거미'였다. 사실 지구와 거미의 대결이라 할만한 스케일은 아니기에 그냥 거미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유명한 마블 영화 스파이더맨을 떠올렸지만 스토리가 지속될수록 히어로가 아닌 빌런이 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꽤 어릴 때 봤음에도 그의 충격적인 변화에 놀라기보단 어쩌면 거미에 쏘인 스파이더맨의 변화를 현실적으로 표현한다면 스파이더맨보다는 괴물 거미 쪽으로 변할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결국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현실은 이것이다라는 것을 아주 잘 표현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